텔레비전 시청의 즐거움은 일일극을 시작으로
드라마와 쇼 오락 콘텐츠의 발전을 가져왔다.
1970년대 초 일일극의 성공은 텔레비전 보급의 확대 뿐만아니라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일극은 일상적 대화소재를 제공함으로써 텔레비전을 일상생활의 중심매체로
부각시켰고 이러한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드라마를 홍보하는
신문 잡지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드라마의 몰입은 단순히 텔레비전 시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적 풍경을 가져왔다.
드라마 여로 같은 경우에는 영화관 관객을 빼앗아버리고
저녁시간에 거리의 사람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했고 영화 이름과 관련된
다방이나 식당 등이 등장했다.
텔레비전 대중문화 시대가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일일극으로 텔레비전을 보기 이전에는 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쇼나 극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고 가장 인기있는 장르였던
극영화 중에서도 외화프로그램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생방송 - 극영화 - 생방송 - 뉴스릴 - 생방송 등 생방송과 필름물로 번갈아 편성되는
패턴이 최초의 정규적인 텔레비전 편성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60년대 들어 외화는 어린이 프로그램 뿐만아니라 8시 전후의 주 시청시간대에도
많이 편성되었고 10시 이후 늦은 밤에는 외화 시츄에이션이 편성되었다.
외화 프로그램과 더불어 쇼 프로그램 역시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 중에서도 <쇼쇼쇼>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쇼쇼쇼>는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매체’라는 점을 보다 명확하게
실현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또한 지금과 같이 세대별로 구분된 음악 프로그램이 아니라
전 가족이 동시에 즐기는 가족잔치로서 종합 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가졌다.
이와 더불어 권투나 레슬링처럼 격투 스포츠 경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특별한 오락이 없던 당시에는 ‘보는 스포츠’의 재미가 컸고
동양의 작은 나라 국민이 서양인이나 일본인을 상대로 불굴의 승리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줌으로써 민족주의 정서를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재미는 현실의 암울함으로써 이탈을 부추기는
‘현실도피적’ 속성을 일찍부터 띠고 있었고
민족주의 정서를 불러일으킨 격투 스포츠 역시 현실 도피적 놀이와 더불어
유기적 국가기관으로서 국가주의를 강화하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 유신 그리고 목적극 : 반공극의 변신과 민족사관 정립극
한국 텔레비전이 일일극에서 시작해 주말드라마, 미니시리즈 등으로
발전한 이면에는 반공극과 같은 목적극의 부침이 있었다.
목적극은 남북분단과 냉전의 틀 속에서 “반공을 국시로 제 1로 삼는”
박정희 정권이 요구에 부응해 만들어진 홍보성 드라마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텔레비전 목적극의 효시는 1964년 KBS의 <실화극장>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번 제목이 바뀌었으나 당초 골격과 반공노선을 유지하면서
1985년 5월까지 방송되었다.
이 목적극의 주된 내용으로 반공정신과 새마을운동 및 유신의 홍보도 있었다.
그러나 극 내용의 지나친 과장과 주인공에 대한 동일시가 불가능한 극 구성,
일일극의 성공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인기가 시들해졌다.
1970년대 후반 목적극은 ‘민족사관 정립극’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의 대중적인
인기장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고 민족사관정립극은 민족의 재발견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국가가 명시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어냈던 목적극형 드라마였다.
사극, 역사적 인물, 교양국사, 대담 프로그램에까지 전통물을 소재로 삼는가 하면
심지어 코미디 프로그램에 까지 고유의상을 분장하도록 했다.
목적극은 유신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방영되었고
여전히 반공이 중요한 테마로 작용하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1985년 2.12 총선 당시 KBS의 ‘총선 홍보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총 15편의 연속드라마를 통해 야당후보를 찍지 말라는 내용으로
당시 ‘땡전뉴스’와 더불어 1980년대 친정부의 방송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행태는 곧이어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텔레비전 시청자 운동과 방송 민주화 운동
형식상 공영방송과 달리 1980년대 방송은 권력밀착형으로 대중의 신뢰를 잃고 있었다.
이유로 권위주의 정권의 탓도 있었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향한 방송의 몸집 불리기와
성장에 권력의 보호막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방송은 편파성과 오락성으로 국민적 분노를 불러 일으켰는데
사회 운동 차원에서는 시청료 거부운동, KBS안보기 운동 등이 펼쳐졌고
직접적으로는 KBS, MBC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 텔레비전의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국민적 불신이 함께 커져가고 있었다.
시청료 거부운동은 방송사에 대한 시청자의 권리 운동의 하나로
불합리한 공영방송 경영과 불공정 방송에 대한 시민 저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편파성과, 오락성, 상업광고에 치중하는 kbs에 시청료까지
내야하는 모순된 상황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한 형태로 평가할 수 있다.
‘KBS 시청료 거부’와 ‘KBS 뉴스 안보기 운동’ 은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이 운동은 1987년 상반기에 방송된 시청률 70.46을 기록한
KBS <광주를 말한다>를 들 수 있는데, 이는 MBC <어머니의 노래>와 더불어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방송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과거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정경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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