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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오프 더 레코드'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요즘 이 개념이 점점 더 대중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어요. 

여러분도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맞나요?ㅎㅎ

오늘 포스팅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의 의미, 사용 방법, 

그리고 혼동될 수 있는 유사 단어인, 엠바고와의 차이점을 포함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려 합니다.

오프 더 레코드 란 무엇인가요?

 

오프 더 레코드라는 표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off the record' 쉽게 말해 원래의 의미는 '기록에 남지 않음'이에요.

보통 기자들이 인용할 수 없는 정보를 공유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물론 비공식적인 언급이나 상황에서도 많이 사용되죠.

이 개념을 잘 이해하면, 중요한 정보 관리나 신뢰 구축 등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보의 중요성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업무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거든요.

이 내용을 통해 뉴스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정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프 더 레코드라는 개념은 어떤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할까요?

첫째, 기자나 언론인입니다. 이들은 다양한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어떻게 다룰지 전략을 세워야 하죠. 

둘째, 공무원이나 정치인도 마찬가지에요. 이들은 민감한 정보를 다루다 보니

오프 더 레코드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어요. 

셋째, 비즈니스 영역의 관리층도 중요하죠. 내부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쓰이는데요, 

친구나 동료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조절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이제 오프 더 레코드의 심층적인 의미와 분석에 대해 알아볼까요? 

먼저, 오프 더 레코드는 기자와 소스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자가 중요한 정부 소식통에게 오프 더 레코드로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정보는 신문에 실리거나 방송에 나갈 수 없어요. 

하지만 기자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추가 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프 더 레코드는 신뢰를 쌓고, 정확한 보도를 가능케 합니다. 

통계적으로도, 중요한 정보의 70%가 오프 더 레코드로 시작된다고 해요. 전문가들도 이 개념을 잘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어요.

오프 더 레코드의 개념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예를 들어, 회사에서 일할 때, 상사가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는 내용을 듣게 된다면, 

이를 공식적으로 퍼뜨리지 않고 내부적으로만 공유하거나 참고해야 해요. 

장점은 신뢰를 쌓고, 중요한 정보를 디테일하게 알 수 있다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잘못된 정보가 더해지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 개념을 잘 이해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단점을 잘 관리하면서도 장점은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죠.

 

일상 생활에서 오프 더 레코드 를 사용한다면?

 

오프 더 레코드를 실생활에서 실제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예를 들어볼게요. 

첫째, 중요한 회의나 대화에서 오프 더 레코드 내용을 명확히 알리세요. 
예를 들어 "이건 그냥 오프 더 레코드로 말씀드리는 건데요..." 라고 말하면 효과적이죠. 

둘째, 오프 더 레코드 정보를 듣게 되었다면, 이를 신중하게 다루세요. 너무 많은 사람에게 말하면 신뢰가 떨어질 수 있어요. 

셋째, 유사한 상황에서 오프 더 레코드와 엠바고의 차이점을 잘 이해하고, 필요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세요. 

네 번째, 특정 정보를 퍼뜨릴 때는 오프 더 레코드로 얻게 된 정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마세요.

 

오프 더 레코드에 관한 질문

 

첫 번째, "오프 더 레코드와 엠바고의 차이는?"

오프 더 레코드는 기록되지 않지만, 엠바고는 일정 시간 동안 공개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어떤 상황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쓸 수 있나요?"

기자와 인터뷰할 때, 중요한 회의에서 비공식적인 내용을 공유할 때 사용됩니다.

 

세 번째, "오프 더 레코드를 어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신뢰가 깨지고, 법적인 문제도 생길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이 개념을 꼭 알아야 하나요?"
네, 비즈니스와 개인적인 신뢰 구축에 매우 중요합니다.잘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오프 더 레코드의 개념과 그 중요성,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셨나요? 

정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신뢰를 쌓는 데 있어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자, 정치인, 비즈니스 매니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를 잘 활용하고 있어요.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잘 이해하고 사용해서 더 나은 의사소통과 정보를 관리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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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시청의 즐거움은 일일극을 시작으로
드라마와 쇼 오락 콘텐츠의 발전을 가져왔다.

1970년대 초 일일극의 성공은 텔레비전 보급의 확대 뿐만아니라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일극은 일상적 대화소재를 제공함으로써 텔레비전을 일상생활의 중심매체로
부각시켰고 이러한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텔레비전 드라마를 홍보하는
신문 잡지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드라마의 몰입은 단순히 텔레비전 시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적 풍경을 가져왔다.

드라마 여로 같은 경우에는 영화관 관객을 빼앗아버리고
저녁시간에 거리의 사람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했고 영화 이름과 관련된
다방이나 식당 등이 등장했다.
텔레비전 대중문화 시대가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일일극으로 텔레비전을 보기 이전에는 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쇼나 극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고 가장 인기있는 장르였던
극영화 중에서도 외화프로그램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생방송 - 극영화 - 생방송 - 뉴스릴 - 생방송 등 생방송과 필름물로 번갈아 편성되는
패턴이 최초의 정규적인 텔레비전 편성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60년대 들어 외화는 어린이 프로그램 뿐만아니라 8시 전후의 주 시청시간대에도
많이 편성되었고 10시 이후 늦은 밤에는 외화 시츄에이션이 편성되었다.
외화 프로그램과 더불어 쇼 프로그램 역시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 중에서도 <쇼쇼쇼>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쇼쇼쇼>는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매체’라는 점을 보다 명확하게
실현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또한 지금과 같이 세대별로 구분된 음악 프로그램이 아니라
전 가족이 동시에 즐기는 가족잔치로서 종합 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가졌다.
이와 더불어 권투나 레슬링처럼 격투 스포츠 경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특별한 오락이 없던 당시에는 ‘보는 스포츠’의 재미가 컸고
동양의 작은 나라 국민이 서양인이나 일본인을 상대로 불굴의 승리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줌으로써 민족주의 정서를 고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재미는 현실의 암울함으로써 이탈을 부추기는
‘현실도피적’ 속성을 일찍부터 띠고 있었고
민족주의 정서를 불러일으킨 격투 스포츠 역시 현실 도피적 놀이와 더불어
유기적 국가기관으로서 국가주의를 강화하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 유신 그리고 목적극 : 반공극의 변신과 민족사관 정립극
한국 텔레비전이 일일극에서 시작해 주말드라마, 미니시리즈 등으로
발전한 이면에는 반공극과 같은 목적극의 부침이 있었다.
목적극은 남북분단과 냉전의 틀 속에서 “반공을 국시로 제 1로 삼는”
박정희 정권이 요구에 부응해 만들어진 홍보성 드라마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텔레비전 목적극의 효시는 1964년 KBS의 <실화극장>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번 제목이 바뀌었으나 당초 골격과 반공노선을 유지하면서
1985년 5월까지 방송되었다.
이 목적극의 주된 내용으로 반공정신과 새마을운동 및 유신의 홍보도 있었다.
그러나 극 내용의 지나친 과장과 주인공에 대한 동일시가 불가능한 극 구성,
일일극의 성공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인기가 시들해졌다.

1970년대 후반 목적극은 ‘민족사관 정립극’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의 대중적인
인기장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고 민족사관정립극은 민족의 재발견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국가가 명시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어냈던 목적극형 드라마였다.
사극, 역사적 인물, 교양국사, 대담 프로그램에까지 전통물을 소재로 삼는가 하면
심지어 코미디 프로그램에 까지 고유의상을 분장하도록 했다.
목적극은 유신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19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방영되었고
여전히 반공이 중요한 테마로 작용하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1985년 2.12 총선 당시 KBS의 ‘총선 홍보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총 15편의 연속드라마를 통해 야당후보를 찍지 말라는 내용으로
당시 ‘땡전뉴스’와 더불어 1980년대 친정부의 방송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행태는 곧이어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텔레비전 시청자 운동과 방송 민주화 운동
형식상 공영방송과 달리 1980년대 방송은 권력밀착형으로 대중의 신뢰를 잃고 있었다.
이유로 권위주의 정권의 탓도 있었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향한 방송의 몸집 불리기와
성장에 권력의 보호막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방송은 편파성과 오락성으로 국민적 분노를 불러 일으켰는데
사회 운동 차원에서는 시청료 거부운동, KBS안보기 운동 등이 펼쳐졌고
직접적으로는 KBS, MBC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 텔레비전의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국민적 불신이 함께 커져가고 있었다.

시청료 거부운동은 방송사에 대한 시청자의 권리 운동의 하나로
불합리한 공영방송 경영과 불공정 방송에 대한 시민 저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편파성과, 오락성, 상업광고에 치중하는 kbs에 시청료까지
내야하는 모순된 상황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한 형태로 평가할 수 있다.
‘KBS 시청료 거부’와 ‘KBS 뉴스 안보기 운동’ 은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이 운동은 1987년 상반기에 방송된 시청률 70.46을 기록한
KBS <광주를 말한다>를 들 수 있는데, 이는 MBC <어머니의 노래>와 더불어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방송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과거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정경기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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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 활동사진의 무선송신, 세계를 좌관하는 기계
1923년 4월 조선일보에서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의 존재를 알렸다.
세계최초 텔레비전으로 공식 기록된 것은 1925년 4월 영국 베어드가
공개실험을 통해 발표한 유선텔레비전인 베이드 20라인 TV으로 ‘전자망원경’이라고 불렸고
이후 1956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등장했다.

박래품TV : 최초의 TV, HLKZ-TV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사인 HLKZ-TV
(속칭 종로방송국, 공식명칭은 rac의 한국지사)이 들어섰다.
원조 경제 하에 있던 한국이 갑작스럽게 텔레비전을 도입하게 된 데에는
기술 엘리트들의 열정과 이국적인 서구문물에 대한 경외,
그리고 특히 미국의 구식 수상기와 다국적 기업의 각종장비, 제도, 광고 등
미국식 텔레비전 방송이 도입된 결과였다.
또한 텔레비전 방송 도입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한 자유당 정부의 의도도 있었다.
즉, 한국에서 텔레비전은 그 기술력은 물론 사회경제적 상화, 소유와 운영,
제작기법 등 미국으로부터 물 건너온 오브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텔레비전의 계보 : 활동사진이 붙은 라디오
초기 텔레비전은 라디오의 연장이었다. 기존의 라디오에 영화의 시각적 기능이 더해진
가족 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족매체로서의 라디오의 지위와 영화에서의
강력한 시각적 효과가 결부된 첨단 테크놀로지였고 이후
가정에 보급되면서 가정테크놀로지로 자리 잡았다.

텔레비전은 처음엔 사적매체를 출발한 건 아니었다.

텔레비전의 초기 집단시청 사례가 보여주듯
텔레비전은 공공 텔레비전의 지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공공장소 혹은 텔레비전 소유가정에서의 집단 시청과 같은
공공 미디어 소비현상은 일찍이 일제 시대 라디오에서의 스포츠 프로그램과
간이 대중의 이목을 끄는 국가적 사안에 대해 공공 청취를 한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국가주의와 같은 집단성을 구현하면서도 근대 사회의 공공적 볼거리로서
방송매체의 신기효과를 통한 판매전략이기도 했다.
또한 공공시청은 텔레비전에 의한 집단기억을 축적하는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공공텔레비전 현상은 다른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활성화 되지 못한 사회 경제적 수준의 한계라고도 비춰진다.
가족 매체적 지위를 물려받았음에도 현실적 여건으로
공공장소의 집단적 시청이 보편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은 가정의 재미를 증가시킴은 물론이고 방안의 여러 기구들과 잘 어울려
방을 훌륭하게 꾸밈으로써 신래장식과 잘 조화 시킬 수 있어야
‘제대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외면적으로는 근대가정의 외양을 근사하게 만듦과 동시에
내면적으로는 그들 구성원의 ‘오락과 가족애’를 가장 잘 발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배치 될 것으로 기대 되었던 것이다.
가정 내 텔레비전 설치는 가정의 근대적 공간화라는 점에서 지극히 문화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안방 혹은 거실이라는 지극히 폐쇄되어있으면서도
가정의 여력이 과시되어 있는 곳에 텔레비전이 위치했다.
이는 내밀성에 기반한 가족주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족과 타인은
물론 가족 간의 활동과 생활리듬도 규율하는데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즉, 텔레비전은 가족 매체적 지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적공간의 근대적 재구성을 담보해주는 물적 조건이었음을 의미한다.


쿠데타 세력의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
1961년 국영 KBS 텔레비전은 향후 다가올 근대화 프로젝트와

동시 병행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본격적인 TV시대를 향한 한걸음이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등장에 위해 급조된 방송국 개국은
‘가난한’ 방송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방송문화 협회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도입되는
텔레비전 수상기에 대한 기대는 ‘붐’이라고 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이후 강력한 경제발전 드라이브와 병행된 중앙 집중적 텔레비전 지원정책을 통해
1970년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텔레비전 문화를 맞게 되었다.

수상기의 국내 조립생산과 전자산업유성법의 시행과 더불어
1970년대 전후 국민소득의 향상, 지방중계소 신설에 따른 가시청지역의 확대,
민방출현에 따른 프로그램 다양화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문화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대중화는 이른바 생활을 전기화 시키는 시발점 역할을 했다.

국가권력은 텔레비전에 대해 능동적이고 의도적인 도입과 육성정책을 폈다.
국가권력이 설정한 테두리에 들어오는 방송에 대해서는 많은 혜택을 부여한 반면,
그렇지 않은 것은 임의적인 합병이나 직간접적인 탄압으로 배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병행된 텔레비전의 기업화와 제도화는

국가가 정해준 제도와 구조내에서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마을TV’ 개발계획은 “농어촌 전화율의 향상과 맞추어 전자제품의 내수기반을
확대하는 한편, 정부의 문화공보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농어촌에 국가가 직접 근대적인
텔레비전 문화혜택을 제공한다는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효자TV’는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지역별로 수행된 자발적 수상기 보급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텔레비전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류인 중상층으로 편입될 수 있는 중요한 기계였다.
점차 늘어나는 안테나와 텔레비전에 대한 대화 소재로부터 일반 서민들이 느끼는
‘정서적 압박’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은 좋은 집안을 위한 필수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문화시설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는 테크놀로지였다.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비판적의식이 일어나지만 새로이 부상하는 강력하고도 지배적인
문화적인 도구로서 텔레비전의 도덕 경제적 속성은 신기술에 대한
저항 자체를 무력화 시켰다.
특별히 다른 가정 테크놀로지와 달리 텔레비전의 안테나의 보이는
효과 때문에 소유욕을 더 크게 자극했다.

한국인에게 텔레비전은 ‘안방극장’이었다.
안방은 가족의 공동휴식과 여가가 이뤄지는 한국의 가족실이었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문화주택’에 처음 도입된 거실이었다.
거실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내에서의 ‘이동로’이면서 동시에 외부 공간으로의
탈출구이자 연결로였으며 타인에게 ‘보이는’공적 공간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거실 깊숙하게 자리 잡을수록 그에 따른 비판도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정서를 해친다거나 선정적 내용이 불결하다는 등
‘시각공해의 인질’로 잡혀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비문화적 비순수한 기계로 비판받았다.
텔레비전은 때로는 문화적이면서 때로는 비문화적으로 간주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는 텔레비전 여가생활이 만개하는 단계였다.
관광 레저붐과 더불어 텔레비전을 포함한 각종 가전제품의 보급은
여가욕구의 개화기를 여는 핵심적 자원이었다.
여자, 남자, 청소년 아이 할 것 없이 여가생활의 대부분을 텔레비전을 보며 보냈다.
텔레비전은 가족구성원들의 단란한 여가활동의 상당부분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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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미지의 매개물 중 대표적인 것은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세계가 완전히 허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본과 권력 혹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가공된 세계임은 분명하다.


텔레비전 방송은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 발전의 산물이다.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이 전파를 탄 날이다.
이는 1936년 영국 런던에서 BBC방송이 첫 TV전파를 발사한 지 20년 만이고
세계에서는 15번째였다.

국내에서 1973년 100만대의 수상기가 보급됨으로써
텔레비전 방송은 국민 생활의 중심미디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방송 및 전자기술 발전으로 콘텐츠도 진화한다.
텔레비전 방송은 위성기술과 케이블TV의 보완으로 공간적 한계를
거의 완벽하게 극복했고 인터넷과 결합함으로써 시간적 한계도 해소되고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의 미래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게 한 것은 텔레비전이 아닌 인터넷 덕분이었다.
현재 텔레비전방송은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 기술로 무장한
통신업체와 개인미디어에게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한국 텔레비전방송은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KBS를 출범하면서 활성화되었다.

1961년 군사정권 KBS, TBC, MBC 개국
1980년 신군부 방송 통폐합, 컬러방송 시작
제 6공화국, 노태우정부 SBS허가로 상업화 가속
김영삼 정부 지역민방과 케이블 TV 사업자 허가 - 다채널방송시대 본격화
김대중 정부 위성방송사업자 허가 - 유료방송 경쟁시대 본격화
참여정부 이후 DMB시작, IPTV가 주요 통신사업자에게 허가
2008년 이명박 정부 종합편성채널 허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텔레비전 붐이 일어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다.
1963년부터 TV광고방송을 시작함으로써 재정 안정의 계기가 마련되었고
전자산업이 수출육성산업으로 되어 수상기를 국내에서 조립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
1960년 초반 주춤하던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은 국내 조립생산이 시작되면서
크게 늘어나 1973년에는 대중매체로써 의미 있는 수라고 할 수 있는 100만 대가 보급되었다.

한국에서 방송국 허가는 1954년 12월 15일 기독교 방송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방송을 필두로 한국복음주의방송, KORCAD, 부산문화방송 등이 잇달아 개국했다.
군사정권은 민간방송의 방송 활동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해 전파관리법을 제정한다.

- 전파관리법 1961년 12월 30일 -
전파의 합리적 관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률로써
1961년 12월 30일 제정, 공포된 이래 7차의 개정을 거쳐
1983년 12월 개정되었는데,
9장 87조 및 부칙 6조로 되어있다.

전파관리법 시행령이 1979년 개정되면서
제22조 허가의 신청 조항은 신설 방송국 허가권을
정부의 공보 관련 부처에 귀속시킴으로써
방송을 정치적으로 제어하는 근거가 되었다.
전파관리법 제정 이후 1963년 라디오 동아를 시작으로
많은 방송사가 허가되었다.
2000년 통합방송법이 제정된 후
방송사의 실질적인, 허가권은 방송위원회로 귀속되었다.
2008년 이후에는 사업자 인, 허가와 관련된
모든 권한이 방송통신위원회로 이관되었다.


- 최초의 텔레비전 KORCAD -
KORCAD는 1956년 5월 12일 한국에서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이 방송은 적자운영으로 운영권을 한국일보에 넘겼고
개국 이듬해인 1957년 5월 6일 대한 방송(DBC)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KORCAD는 처음부터 상업방송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 수입을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경제 여건이 텔레비전 광고를 뒷받침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설립 당시의 예상과는 달리 수상기 보급도 지지부진하자
TV 방송국 운영을 포기한다.
DBC로 개편된 후에도 경영난은 계속되었다.
이후 얼마 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61년 10월 15일 문을 닫았다.

- 국영방송의 개막 KBS -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서둘러 방송 관련 법령을 제정하였다.
1961년 12월 31일 국영방송인 KBS에 의해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국영 텔레비전 방송사업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국영텔레비전방송사업 특별회계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유선방송을 관리하기 위하여 ‘유선방송 수신 관리법’도 제정했다.
이 법은 시민의 라디오 수신을 장려함으로써 국가시책을 신속하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국영방송이지만 비용을 마련한 근거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1968년까지 정부예산, 시청료, 광고수입이 혼재하는 기형적 재원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KBS는 1973년 국영이라는 딱지를 떼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방송공사로 제출 점했다.
방송위원회와 국회가 경영을 감독하는 전형적인 공기업이 되었다.

- 기업 방송의 개막 TBC -
동양방송은 1964년 5월 라디오 서울로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텔레비전까지 확대했다.
국내 최초 대기업에 의한 텔레비전 방송이었다.
TBC는 상업방송 특징을 살려 연예, 오락물에 주력했다.
1980년 12월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KBS로 통합되어
라디오는 제3방송, 텔레비전은 KBS 2 채널, FM은 제 2FM이 되었다.
동양방송은 다음 네 가지를 경영방침으로 내세웠다.
1. 민주주의 원칙하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질서 유지와
대중문화 향상을 뒷받침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2. 공정성을 생명으로 삼고 정당한 입장에 서서 신속하고 정확한 전달과
민주언론 창달에 올바른 여론을 조성하고 반영한다.
3. 건전하고 생산적인 내용의 교양과 오락 등을 제공함으로써
명랑한 사회 건설에 이바지한다.
4. 의욕적이고 진취적인 생산기업을 운영을 위한 매개자로서
최선의 봉사를 다한다.

- 경영방침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두 가지이다.
대중문화 향상을 뒷받침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라는 말과
의욕적이고 진취적인 생산기업 운영을 위한 매개자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상업방송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소유주체인
자본의 이해와 목표를 위해 방송을 운영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상업적 운영을 통해 돈을 버는 동시에 기업 운영의 방패로 이용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에도 삼성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운영했다.
15년이 흐른 1980년 후 군사정권이 언론을 통폐합하면서
신문과 방송 겸영을 금지했다.
2008년 방송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의 방송 참여를 허용하는 것은 29년 만에 칸막이를 없애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한 바 있다.

- 이중의 정체성 MBC -
MBC는 1961년 12월 2일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했다
MBC-TV는 1969년 8월 8일에 개국했다.
1974년 경향신문사와 통합되기도 했으나 1980년 신문과 방송이 겸영을 금지하는
언론 기본법 제정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MBC는 1959년 4월 15일에 개국한 부산문화방송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MBC-TV는 민영방송과 관영방송, 공영방송의 성격이 혼재하게 되었다.
1968년 MBC 텔레비전은 국내의 두 번째 민영 텔레비전 방송으로 개국했다.
편성 방침은 다음 여섯 가지이다.
1. 재래식 편성 방식에서 탈피한다.
2. 생활시간 및 습관과 일치시킨다.
3. 높은 시청률과 프로그램 판매를 동시에 고려한다.
4. 프로그램 시청 대상을 명확히 한다.
5. 일정 수준의 사회교양을 견지한다.
6. 해설과 속보성을 동시에 갖춘 보도를 지향한다.

이후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되기 전까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실상 소유한 관영방송 시기였다.
그러다가 1988년 언론 기본법 폐지에 따라 설립된 방송문화진흥회에서
kbs가 가지고 있던 주식을 인수함으로써 특수법인이 소유하는
공영방송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2월 방송문화진흥회 법이 통과되면서 mbc는 소유구조상
명확한 공영방송이 되었다.
mbc 문화방송의 경우 소유구조에 있어서는 방송문화진흥회라는
공적 조직에 구속되지만 주식회사로서 시청자에 대한
직접 지불 요구 없이 광고재원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상충되는 것 같지만 사실상 공민영방송의 장점을 잘 살린 구조이기도 하다.


- 상업주의 방송 sbs -
서울방송은 서울, 경기, 충청 및 강원 일부를 가청 구역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고,
1991년 12월 9일 텔레비전을 개국한다.
sbs는 단군 이래 최대의 특혜라는 의혹 속에서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5년 지역민방이 허가되면서 서울 범위를 벗어나
전국방송이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민영방송이라기보다는 독점 사영방송이라고 할 수 있는
sbs는 이후 한국의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의 질을 지속적으로
하향 평준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방송은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관영방송체제로 시작되었다.

- 이승만 정부는 민영방송국을 잇달아 허가했다.
-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방송 관련 법령들을 제정했다.
- 1972년 10월 유신 직후인 12월 30일 한국방송공사법이 제정되었다.
한국의 방송체제는 국민 영 방송체제에서 공민영방송체제로 바뀐다.
- 1973년 2월 16일에는 기존 방송법이 개정되었다.
개정된 방송법의 핵심은 방송 통제 강화
- 신군부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대대적인 언론 통제에 착수했다.
1980년 7월 언론인 강제 해직에 이어 11월 언론통폐합 조치가 발표되었다.
당시 방송협회와 신문협회의 자율 정화 형식으로 발표된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는 언론기관의 난립 등 전근대적 언론구조의 개선 등을 요구한 것이었다.
1980년 12월 31일에는 기존의 신문, 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언론윤리위원회법 그리고 방송법이 폐지되고 대신 언론 문제를
통합적으로 규율하는 언론 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공영방송체제를 이끌 최고 감독기관인 방송위원회가 출범하였다.
한국방송광고공사법도 제정되었다.
1987년 시민항쟁 이후 고조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언론 기본법은 폐지되었다.
1988년 12월 26일에는 방송문화진흥회 법이 제정되었다.
노태우 정권 출 법 이후 그 해 6월 14일 일방적인 방송구조 개편 계획을 발표하였다.
결국 1990년 8월 1일 공보처 개편안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방송법이 개정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기에는 이전의 정책 기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의 방송정책은 공익성보다 산업적 측면에서 더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전과 같은 물리적, 강압적인 통제가 없는 대신 비공식적인 간접통제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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