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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파 방송 밀청 사건 -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은 1942년에 서울의 경성방송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인 독립운동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단파 방송 수신 사건, 단파 방송 청취 사건이라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외국의 정세가 한국인에게 전파될까 봐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는 등 단파방송 청취자 단속을 강화했지만,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과 중국 국민정부가 송출하는 중경 방송국 한국어 방송을 듣곤 했다.
일제는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있다는 소문의 근원을 찾고자 했고,
단파방송이 그러한 소식의 원천으로 지목되었다. 
일본 고등계 경찰은 경성(당시 서울)에서 경성방송국의 단파 수신기 관리 근무자 등 
1942년 12월 말에서 1943년 초까지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해 경성방송국 직원 6명과 단파방송을 직접 듣거나
거기에 관련된 150명 가까운 방송인과 민간인 150~300여명이 체포되었다.
1943년 3월 공판이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75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중 6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적인 기록 말살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고,
관련자에 대한 예우도 충분하지 않다.

미군정은 해방 후 경성방송국 기존 인력이 종전대로 방송을 계속하도록 했다.
해방 후 한국방송은 기존의 일본 방식에 미국식 상업주의시스템이 접목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사실 해방 후 방송은 민족 부흥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편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방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각 점령지역에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시장을 구축하는 차원에서 라디오를 접수했다. 
미군정 시기의 방송은 일종의 국영체제로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관철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침투 저지라는 두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미군정청이 방송을 직접 장악한 것은 방송을 유용한 선전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59년에는 최초의 민영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이 개국했다.
정부가 수립된 지 두달여만에 '정부조직법'에 따라 방송은
다시 공보처의 일개 부서로 흡수된다.
강력하게 뒷받침 된 이데올로기 홍보 매체로서의 방송은 계속되었다.

6.25 전쟁 이후 한국 라디오는 국책 홍보 수단 내지는 국민교육 수단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1956년 최초의 방송 전문 잡지라고 할 수 있는
[월간 방송]을 창간했다.
라디오의 재미를 회복시킨 것은 미국 기독교 자본을 배경으로 등장한
최초의 민간방송 CBS와 최초의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이었다.
그럼에도 1950년대 라디오 뉴스는 공보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에서 라디오 뉴스는 민방이 본격적인 경쟁체제를 구축한 1960년대 중반
전국을 연결하는 종합 보도프로그램이나 저녁 뉴스쇼가 등장하면서 외형을 갖추게 된다.
정부는 국가 홍보 필요에 따라 1950년대 말 방송 재건과 라디오 수신기 보급에 적극 나선다.

군사정권 등장 이후 새로운 민영방송이 계속 설립되었다.
군사정권은 1962년 6월 직접 통제의 부작용을 우려하여 자율규제라는 명분으로
방송윤리위원회를 출범시킨다. 1960년대 이후 한국방송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조국 근대화의 기관차 혹은 국가 계몽의 확성기 역할을
하는 동시에 상업적 경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서구에서 라디오 방송은 20세기 초 등장한 전화와는 다른
대중매체로서의 의미 형성을 통해 사회의 공적 자원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라디오는 새로운 미디어로서 가치를 인정받았고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빠르게 대중화 되었다. 결국 한국 방송은 국가권력이 요구하는 선전과 공보,
미디어 기업이 요구하는 상업적 이익이 절충되는 지점에서 성장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방송정책 역시 정부의 홍보 및 선전 매체로서의
기능 확대를 위하여 그리고 5.16 이후 몇 차례의 정변 시기에도 방송은 정권 안위를 위한
주요 매체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한국 라디오의 태생적 한계는 이후
텔레비전, 다채널방송 등 새로운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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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전파미디어인 라디오는 1920년대 시작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라디오 방송은 자국외의 식민주의 세력의
필요성에 따라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인 경성방송국은
1927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 전략이자
문화 정치수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라디오는 해방 이후 역시 미군정을 거치면서
국가의 공보수단으로 국가시스템의 일부가 되었다.
한국라디오의 경우 일본 방송시스템이 이식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국식의 상업주의와 언론 자유라는 가치가 혼재하게 되었다.

근대 미디어들은 1940년대를 거치면서
미디어의 본질적 성격과 무관하게 국가의 통치수단이나
공공정보를 확산하는 수단 혹은 '확성기'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라디오는 이전의 신문이나 소설과 같은 사적 미디어와는
확연히 다른 공적인 시스템과 가정 혹은 마을 단위의 공동수신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 이전에는 신문이나 대중소설이 이러한 기능을 제한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라디오가 발전하게 된 것은 해상에서 통신의 혁신을 위해서였다.
1920년 미국에서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된 이후,
라디오는 신속하게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대중매체로서 라디오는 신속성이 있고,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친밀감이 있으며, 문자 독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상시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라디오는 현장에서 바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고,
메시지 제작과 송수신에 있어서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작용하여 라디오는 발생 이후,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가장 보편적인 미디어로 남아있다.
이렇듯 라디오는 대중의 일상생활 공간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최초의 미디어였고 그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한 국가 권력과 자본이
경쟁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는 국가권력이 방송국을 직접 설립, 운영함으로써
용이하게 백성을 국민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한국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네번째 방송국으로 출범한 경성방송국은 내선일체 원칙에 따라
콜사인까지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배정받았던 것이다.
경성방송국 설립의 목적도 최초 방송에 실렸던 일본 국가처럼,
식민지 정책전달, 황민화운동의 전개, 제국주의 목적 달성을 위한
사탕발림이라는 3대 사명에 내선융화라는 식민지 총독부 정책이 가미된 것 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방송의 핵심기능으로 이어져 온 '선전' 혹은 '공보'기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방송구조, 행정, 편성, 장르, 기술, 인력은 청산되지 못한 식민의 잔재였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민간방송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라디오를 식민통치 수단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라디오방송은 국민이 국가 이슈에 주목하게 하는 보도미디어이자
국민교화 미디어로 자리 잡는다. 이후 일본 라디오 방송은
민주사변을 계기로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완전한 선전기관으로 변모하여 국민총동원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었다. 경성방송국이 1933년 이후 일본어, 조선어
이중방송을 내보내게 된 것은 사실 원활한 전쟁수행과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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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신문이란 별쇄형태로 편집되어야 하고

별쇄의 내용이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섹션의 유형은 크게 분류 섹션과 부가 섹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분류섹션 -

신문지면의 급격한 증가로 인하여 독자들이

신문기사를 제대로 찾아보기 어렵게 된 상황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본지 개념에 속하는 고정된 내용을 주제별로 분리해

매일 똑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고정 섹션의 성격을 띰

 

- 부가 섹션 -

기존의 본체 신문을 두고 새로운 신문 독자의 영입을 위하여

특별한 주제의 부록판을 일정한 주기별로 만든 데 기원을 둔 것

요일이나 특별한 사안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는

가변 섹션의 형식을 주로 취함

 

신문의 섹션화는 몇 가지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1. 유사한 기사를 통합하여 독자들의 기사 접근을 쉽게 해주는 기사의 유목화 기능

2. 특정지면에 유사한 정보들이 집중적으로 모이면서 정보의 전문화가 진전

3. 신문의 전체적 통일성과 지면별 개성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지면의 시각화. 즉, 다량의 특화된 정보를 효과적으로 분류, 제시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색채나 그래픽 등의 시각적 만족을 줄 수 있는 수단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 신문중에서는 <중앙일보>가 최초로 1994년 9월부터

본지, 경제섹션, 스포츠 섹션의3 섹션 체제를 실시했다.

1997년부터 신문들이 본격적으로 섹션화를 시도했다.

섹션제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신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면인 동시에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기피하는 신세대를 겨냥한 대응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섹션면은 독자들의 다양하고 전문화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써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신문들이 분류 섹션뿐만 아니라

연성화 된 내용을 중심으로 부가 섹션을 활발히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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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에 200명의 독자를 임의로 선정하여

신문의 보도 내용이 공정하다는 질문을 했을 때,

"공정하다"는 응답자 수는 12,79%

"공정하지 못 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63.95%였다.

이 조사에서 과거와 다른 점은 독자들이 기사에 대한 관심도에서

해외토픽이 1위, 만화가 2위로 나타났던 것.

이 조사에서 독자들의 인식의 변화경향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신문의 특성은

'신문의 획일화'와 '사설무용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신 말기의 신문 사설에 대해서는 비판형, 해설형은 거의 사라지고

칭찬형, 건의형 사설이 늘어났으며

그나마도 정치적 문제는 사설로써

가능한 한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마저 있었다.

결국 논조의 획일화가 심화되고,

사설의 비판적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0년대 후반에 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가 달라졌으며,

사회면이나 문화면으로 경쟁하게 된 신문들에서

이제 선정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독자들의 상당수는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정치기사보다는

재미있는 문화기사나 실용적인 경제기사를 더 선호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는 신문들은 정치신문의 성향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발표기사들의 기술적인 나열만으로 신문들의 개성을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유신정권의 출범이후 신문들의 경쟁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신문연재 소설이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일보에 연재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이었다.

이 뒤를 이은 아류작들은 호스티스 문학으로 불렸다.

 

신문이 자유를 얻는 순간부터 바로 신문의 구독률이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 중 가구 구독률이 가장 눈에 띄게 줄었는데,

가구 구독률의 감소는 열독 시간의 감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접하는 창구로 신문을 택하지 않고

다른 매체로 급격하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독률의 하락은 젊은 독자들의 이탈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은 주로 인터넷 포털이나 인터넷 신문만을 접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합한 무료신문만을 보는 독자들이 늘어나면서

뉴스에 대한 관념도 바뀌어 갔다.

젊은 세대들은 스포츠나 연예, 오락기 사는 물론이고 이 외에도

생활경제 뉴스나 건강, 여행기사 등 전체적으로 가벼운 뉴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거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정치나 사회 같은 공공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신문제작에 컴퓨터를 도입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1세대는 컴퓨터로 입력된 기사를 출력기로 뽑아 오려 붙이는 방식으로 사식기 중심형

2세대는 사진과 컷 등 화상을 제외한 부분을 컴퓨터로 편집, 페이지 단위로 출력하고

그 위에 별도로 처리된 화상 부분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전자 편집형

무엇보다도 3세대 이후 전지면 편집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큰 변화였다.

3세대는 사진과 제목을 스캐너로 읽어 들여 기사와 함께 편집해,

면 단위로 출력하는 전지면 편집 방식을 말한다.

CTS (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의 약자로

원고 작성에서 조판에 이르기까지 전산화된 체계를 말한다.

1990년대에 들어 컴퓨터와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로 원고 작성부터

사진 촬영과 전송, 레이아웃에서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전산화되었다.

 

CTS로 이행된다는 것은 단순히 납 활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변화를 가져왔다.

CTS로 이행하면서 영구적인 기사 축적과 반복 이용이 가능해졌다는 점이 중요했다.

 CTS로의 이행은 단순히 인쇄기술의 변화를 넘어서서 종이신문이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 신문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또한 CTS의 도입은 보도체계의

기동성과 편집의 역동성을 가능케 해주었다.

편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크게 단축됨으로써

마감시간도 많이 늦출 수 있게 되었다.

CTS는 신문이 나름대로 신속성과 정확성을 높이는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

즉, CTS의 도입은 신문이 다른 매체와 경쟁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CTS 제작 시스템의 도입은 가로 쓰기 체제로의 전환도 촉진시켰다.

기술적으로 CTS방식에 가장 적합한 지면 구성은 가로 편집 체제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신문이 가로 쓰기를 해야 하는 이유로 크게 3가지가 강조되었다.

첫째는 시대적 추세로서 독서물이 거의 다 가로 짜기로 변화되어 있는 가운데

신문만이 여전히 세로 쓰기를 하고 있어서 불편을 초래했다는 것.

둘째는 가독성이 높다는 것, 한글 구조의 특성상 세로 쓰기를 할 때보다

가로 쓰기를 하는 것이 읽기에 훨씬 더 편하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CTS 제작 시스템에는 가로 쓰기가 더 적합하다는 기술적 이유를 들 수 있다.

 

젊은 세대일수록 가로 쓰기를 더 선호했으며, 가로 쓰기가 좋은 이유로는

교과서와 다른 여러 책자가 가로 쓰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라는 대답이

지배적이었고, 읽기 편하다. 눈에 피로가 적고 탐독하기 좋다가 그다음으로 나타났다.

가로 쓰기는 CTS의 도입이라는 기술적 변화의 영향과 독자들의 가로쓰기 선호가 함께 작용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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