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전파미디어인 라디오는 1920년대 시작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라디오 방송은 자국외의 식민주의 세력의
필요성에 따라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인 경성방송국은
1927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 전략이자
문화 정치수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라디오는 해방 이후 역시 미군정을 거치면서
국가의 공보수단으로 국가시스템의 일부가 되었다.
한국라디오의 경우 일본 방송시스템이 이식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국식의 상업주의와 언론 자유라는 가치가 혼재하게 되었다.
근대 미디어들은 1940년대를 거치면서
미디어의 본질적 성격과 무관하게 국가의 통치수단이나
공공정보를 확산하는 수단 혹은 '확성기'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라디오는 이전의 신문이나 소설과 같은 사적 미디어와는
확연히 다른 공적인 시스템과 가정 혹은 마을 단위의 공동수신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 이전에는 신문이나 대중소설이 이러한 기능을 제한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라디오가 발전하게 된 것은 해상에서 통신의 혁신을 위해서였다.
1920년 미국에서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된 이후,
라디오는 신속하게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대중매체로서 라디오는 신속성이 있고,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친밀감이 있으며, 문자 독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상시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라디오는 현장에서 바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고,
메시지 제작과 송수신에 있어서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작용하여 라디오는 발생 이후,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가장 보편적인 미디어로 남아있다.
이렇듯 라디오는 대중의 일상생활 공간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최초의 미디어였고 그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한 국가 권력과 자본이
경쟁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는 국가권력이 방송국을 직접 설립, 운영함으로써
용이하게 백성을 국민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한국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네번째 방송국으로 출범한 경성방송국은 내선일체 원칙에 따라
콜사인까지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배정받았던 것이다.
경성방송국 설립의 목적도 최초 방송에 실렸던 일본 국가처럼,
식민지 정책전달, 황민화운동의 전개, 제국주의 목적 달성을 위한
사탕발림이라는 3대 사명에 내선융화라는 식민지 총독부 정책이 가미된 것 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방송의 핵심기능으로 이어져 온 '선전' 혹은 '공보'기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방송구조, 행정, 편성, 장르, 기술, 인력은 청산되지 못한 식민의 잔재였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민간방송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라디오를 식민통치 수단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라디오방송은 국민이 국가 이슈에 주목하게 하는 보도미디어이자
국민교화 미디어로 자리 잡는다. 이후 일본 라디오 방송은
민주사변을 계기로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완전한 선전기관으로 변모하여 국민총동원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었다. 경성방송국이 1933년 이후 일본어, 조선어
이중방송을 내보내게 된 것은 사실 원활한 전쟁수행과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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