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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 활동사진의 무선송신, 세계를 좌관하는 기계
1923년 4월 조선일보에서 텔레비전 테크놀로지의 존재를 알렸다.
세계최초 텔레비전으로 공식 기록된 것은 1925년 4월 영국 베어드가
공개실험을 통해 발표한 유선텔레비전인 베이드 20라인 TV으로 ‘전자망원경’이라고 불렸고
이후 1956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등장했다.

박래품TV : 최초의 TV, HLKZ-TV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사인 HLKZ-TV
(속칭 종로방송국, 공식명칭은 rac의 한국지사)이 들어섰다.
원조 경제 하에 있던 한국이 갑작스럽게 텔레비전을 도입하게 된 데에는
기술 엘리트들의 열정과 이국적인 서구문물에 대한 경외,
그리고 특히 미국의 구식 수상기와 다국적 기업의 각종장비, 제도, 광고 등
미국식 텔레비전 방송이 도입된 결과였다.
또한 텔레비전 방송 도입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해석한 자유당 정부의 의도도 있었다.
즉, 한국에서 텔레비전은 그 기술력은 물론 사회경제적 상화, 소유와 운영,
제작기법 등 미국으로부터 물 건너온 오브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텔레비전의 계보 : 활동사진이 붙은 라디오
초기 텔레비전은 라디오의 연장이었다. 기존의 라디오에 영화의 시각적 기능이 더해진
가족 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족매체로서의 라디오의 지위와 영화에서의
강력한 시각적 효과가 결부된 첨단 테크놀로지였고 이후
가정에 보급되면서 가정테크놀로지로 자리 잡았다.

텔레비전은 처음엔 사적매체를 출발한 건 아니었다.

텔레비전의 초기 집단시청 사례가 보여주듯
텔레비전은 공공 텔레비전의 지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공공장소 혹은 텔레비전 소유가정에서의 집단 시청과 같은
공공 미디어 소비현상은 일찍이 일제 시대 라디오에서의 스포츠 프로그램과
간이 대중의 이목을 끄는 국가적 사안에 대해 공공 청취를 한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국가주의와 같은 집단성을 구현하면서도 근대 사회의 공공적 볼거리로서
방송매체의 신기효과를 통한 판매전략이기도 했다.
또한 공공시청은 텔레비전에 의한 집단기억을 축적하는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공공텔레비전 현상은 다른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활성화 되지 못한 사회 경제적 수준의 한계라고도 비춰진다.
가족 매체적 지위를 물려받았음에도 현실적 여건으로
공공장소의 집단적 시청이 보편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은 가정의 재미를 증가시킴은 물론이고 방안의 여러 기구들과 잘 어울려
방을 훌륭하게 꾸밈으로써 신래장식과 잘 조화 시킬 수 있어야
‘제대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외면적으로는 근대가정의 외양을 근사하게 만듦과 동시에
내면적으로는 그들 구성원의 ‘오락과 가족애’를 가장 잘 발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배치 될 것으로 기대 되었던 것이다.
가정 내 텔레비전 설치는 가정의 근대적 공간화라는 점에서 지극히 문화적
실천이었던 셈이다. 안방 혹은 거실이라는 지극히 폐쇄되어있으면서도
가정의 여력이 과시되어 있는 곳에 텔레비전이 위치했다.
이는 내밀성에 기반한 가족주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족과 타인은
물론 가족 간의 활동과 생활리듬도 규율하는데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즉, 텔레비전은 가족 매체적 지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적공간의 근대적 재구성을 담보해주는 물적 조건이었음을 의미한다.


쿠데타 세력의 ‘혁명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
1961년 국영 KBS 텔레비전은 향후 다가올 근대화 프로젝트와

동시 병행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본격적인 TV시대를 향한 한걸음이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등장에 위해 급조된 방송국 개국은
‘가난한’ 방송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방송문화 협회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도입되는
텔레비전 수상기에 대한 기대는 ‘붐’이라고 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이후 강력한 경제발전 드라이브와 병행된 중앙 집중적 텔레비전 지원정책을 통해
1970년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텔레비전 문화를 맞게 되었다.

수상기의 국내 조립생산과 전자산업유성법의 시행과 더불어
1970년대 전후 국민소득의 향상, 지방중계소 신설에 따른 가시청지역의 확대,
민방출현에 따른 프로그램 다양화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문화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대중화는 이른바 생활을 전기화 시키는 시발점 역할을 했다.

국가권력은 텔레비전에 대해 능동적이고 의도적인 도입과 육성정책을 폈다.
국가권력이 설정한 테두리에 들어오는 방송에 대해서는 많은 혜택을 부여한 반면,
그렇지 않은 것은 임의적인 합병이나 직간접적인 탄압으로 배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병행된 텔레비전의 기업화와 제도화는

국가가 정해준 제도와 구조내에서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마을TV’ 개발계획은 “농어촌 전화율의 향상과 맞추어 전자제품의 내수기반을
확대하는 한편, 정부의 문화공보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농어촌에 국가가 직접 근대적인
텔레비전 문화혜택을 제공한다는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효자TV’는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지역별로 수행된 자발적 수상기 보급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텔레비전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류인 중상층으로 편입될 수 있는 중요한 기계였다.
점차 늘어나는 안테나와 텔레비전에 대한 대화 소재로부터 일반 서민들이 느끼는
‘정서적 압박’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은 좋은 집안을 위한 필수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문화시설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는 테크놀로지였다.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비판적의식이 일어나지만 새로이 부상하는 강력하고도 지배적인
문화적인 도구로서 텔레비전의 도덕 경제적 속성은 신기술에 대한
저항 자체를 무력화 시켰다.
특별히 다른 가정 테크놀로지와 달리 텔레비전의 안테나의 보이는
효과 때문에 소유욕을 더 크게 자극했다.

한국인에게 텔레비전은 ‘안방극장’이었다.
안방은 가족의 공동휴식과 여가가 이뤄지는 한국의 가족실이었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문화주택’에 처음 도입된 거실이었다.
거실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내에서의 ‘이동로’이면서 동시에 외부 공간으로의
탈출구이자 연결로였으며 타인에게 ‘보이는’공적 공간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거실 깊숙하게 자리 잡을수록 그에 따른 비판도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정서를 해친다거나 선정적 내용이 불결하다는 등
‘시각공해의 인질’로 잡혀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비문화적 비순수한 기계로 비판받았다.
텔레비전은 때로는 문화적이면서 때로는 비문화적으로 간주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는 텔레비전 여가생활이 만개하는 단계였다.
관광 레저붐과 더불어 텔레비전을 포함한 각종 가전제품의 보급은
여가욕구의 개화기를 여는 핵심적 자원이었다.
여자, 남자, 청소년 아이 할 것 없이 여가생활의 대부분을 텔레비전을 보며 보냈다.
텔레비전은 가족구성원들의 단란한 여가활동의 상당부분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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