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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미지의 매개물 중 대표적인 것은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세계가 완전히 허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본과 권력 혹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가공된 세계임은 분명하다.


텔레비전 방송은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 발전의 산물이다.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이 전파를 탄 날이다.
이는 1936년 영국 런던에서 BBC방송이 첫 TV전파를 발사한 지 20년 만이고
세계에서는 15번째였다.

국내에서 1973년 100만대의 수상기가 보급됨으로써
텔레비전 방송은 국민 생활의 중심미디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방송 및 전자기술 발전으로 콘텐츠도 진화한다.
텔레비전 방송은 위성기술과 케이블TV의 보완으로 공간적 한계를
거의 완벽하게 극복했고 인터넷과 결합함으로써 시간적 한계도 해소되고 있다.

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의 미래가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게 한 것은 텔레비전이 아닌 인터넷 덕분이었다.
현재 텔레비전방송은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 기술로 무장한
통신업체와 개인미디어에게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한국 텔레비전방송은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KBS를 출범하면서 활성화되었다.

1961년 군사정권 KBS, TBC, MBC 개국
1980년 신군부 방송 통폐합, 컬러방송 시작
제 6공화국, 노태우정부 SBS허가로 상업화 가속
김영삼 정부 지역민방과 케이블 TV 사업자 허가 - 다채널방송시대 본격화
김대중 정부 위성방송사업자 허가 - 유료방송 경쟁시대 본격화
참여정부 이후 DMB시작, IPTV가 주요 통신사업자에게 허가
2008년 이명박 정부 종합편성채널 허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텔레비전 붐이 일어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다.
1963년부터 TV광고방송을 시작함으로써 재정 안정의 계기가 마련되었고
전자산업이 수출육성산업으로 되어 수상기를 국내에서 조립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
1960년 초반 주춤하던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은 국내 조립생산이 시작되면서
크게 늘어나 1973년에는 대중매체로써 의미 있는 수라고 할 수 있는 100만 대가 보급되었다.

한국에서 방송국 허가는 1954년 12월 15일 기독교 방송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방송을 필두로 한국복음주의방송, KORCAD, 부산문화방송 등이 잇달아 개국했다.
군사정권은 민간방송의 방송 활동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해 전파관리법을 제정한다.

- 전파관리법 1961년 12월 30일 -
전파의 합리적 관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률로써
1961년 12월 30일 제정, 공포된 이래 7차의 개정을 거쳐
1983년 12월 개정되었는데,
9장 87조 및 부칙 6조로 되어있다.

전파관리법 시행령이 1979년 개정되면서
제22조 허가의 신청 조항은 신설 방송국 허가권을
정부의 공보 관련 부처에 귀속시킴으로써
방송을 정치적으로 제어하는 근거가 되었다.
전파관리법 제정 이후 1963년 라디오 동아를 시작으로
많은 방송사가 허가되었다.
2000년 통합방송법이 제정된 후
방송사의 실질적인, 허가권은 방송위원회로 귀속되었다.
2008년 이후에는 사업자 인, 허가와 관련된
모든 권한이 방송통신위원회로 이관되었다.


- 최초의 텔레비전 KORCAD -
KORCAD는 1956년 5월 12일 한국에서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이 방송은 적자운영으로 운영권을 한국일보에 넘겼고
개국 이듬해인 1957년 5월 6일 대한 방송(DBC)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KORCAD는 처음부터 상업방송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 수입을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경제 여건이 텔레비전 광고를 뒷받침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설립 당시의 예상과는 달리 수상기 보급도 지지부진하자
TV 방송국 운영을 포기한다.
DBC로 개편된 후에도 경영난은 계속되었다.
이후 얼마 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961년 10월 15일 문을 닫았다.

- 국영방송의 개막 KBS -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서둘러 방송 관련 법령을 제정하였다.
1961년 12월 31일 국영방송인 KBS에 의해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국영 텔레비전 방송사업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국영텔레비전방송사업 특별회계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유선방송을 관리하기 위하여 ‘유선방송 수신 관리법’도 제정했다.
이 법은 시민의 라디오 수신을 장려함으로써 국가시책을 신속하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국영방송이지만 비용을 마련한 근거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1968년까지 정부예산, 시청료, 광고수입이 혼재하는 기형적 재원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KBS는 1973년 국영이라는 딱지를 떼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방송공사로 제출 점했다.
방송위원회와 국회가 경영을 감독하는 전형적인 공기업이 되었다.

- 기업 방송의 개막 TBC -
동양방송은 1964년 5월 라디오 서울로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텔레비전까지 확대했다.
국내 최초 대기업에 의한 텔레비전 방송이었다.
TBC는 상업방송 특징을 살려 연예, 오락물에 주력했다.
1980년 12월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KBS로 통합되어
라디오는 제3방송, 텔레비전은 KBS 2 채널, FM은 제 2FM이 되었다.
동양방송은 다음 네 가지를 경영방침으로 내세웠다.
1. 민주주의 원칙하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질서 유지와
대중문화 향상을 뒷받침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2. 공정성을 생명으로 삼고 정당한 입장에 서서 신속하고 정확한 전달과
민주언론 창달에 올바른 여론을 조성하고 반영한다.
3. 건전하고 생산적인 내용의 교양과 오락 등을 제공함으로써
명랑한 사회 건설에 이바지한다.
4. 의욕적이고 진취적인 생산기업을 운영을 위한 매개자로서
최선의 봉사를 다한다.

- 경영방침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두 가지이다.
대중문화 향상을 뒷받침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라는 말과
의욕적이고 진취적인 생산기업 운영을 위한 매개자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상업방송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소유주체인
자본의 이해와 목표를 위해 방송을 운영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상업적 운영을 통해 돈을 버는 동시에 기업 운영의 방패로 이용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에도 삼성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운영했다.
15년이 흐른 1980년 후 군사정권이 언론을 통폐합하면서
신문과 방송 겸영을 금지했다.
2008년 방송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의 방송 참여를 허용하는 것은 29년 만에 칸막이를 없애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한 바 있다.

- 이중의 정체성 MBC -
MBC는 1961년 12월 2일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했다
MBC-TV는 1969년 8월 8일에 개국했다.
1974년 경향신문사와 통합되기도 했으나 1980년 신문과 방송이 겸영을 금지하는
언론 기본법 제정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MBC는 1959년 4월 15일에 개국한 부산문화방송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MBC-TV는 민영방송과 관영방송, 공영방송의 성격이 혼재하게 되었다.
1968년 MBC 텔레비전은 국내의 두 번째 민영 텔레비전 방송으로 개국했다.
편성 방침은 다음 여섯 가지이다.
1. 재래식 편성 방식에서 탈피한다.
2. 생활시간 및 습관과 일치시킨다.
3. 높은 시청률과 프로그램 판매를 동시에 고려한다.
4. 프로그램 시청 대상을 명확히 한다.
5. 일정 수준의 사회교양을 견지한다.
6. 해설과 속보성을 동시에 갖춘 보도를 지향한다.

이후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되기 전까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사실상 소유한 관영방송 시기였다.
그러다가 1988년 언론 기본법 폐지에 따라 설립된 방송문화진흥회에서
kbs가 가지고 있던 주식을 인수함으로써 특수법인이 소유하는
공영방송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2월 방송문화진흥회 법이 통과되면서 mbc는 소유구조상
명확한 공영방송이 되었다.
mbc 문화방송의 경우 소유구조에 있어서는 방송문화진흥회라는
공적 조직에 구속되지만 주식회사로서 시청자에 대한
직접 지불 요구 없이 광고재원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상충되는 것 같지만 사실상 공민영방송의 장점을 잘 살린 구조이기도 하다.


- 상업주의 방송 sbs -
서울방송은 서울, 경기, 충청 및 강원 일부를 가청 구역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고,
1991년 12월 9일 텔레비전을 개국한다.
sbs는 단군 이래 최대의 특혜라는 의혹 속에서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5년 지역민방이 허가되면서 서울 범위를 벗어나
전국방송이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민영방송이라기보다는 독점 사영방송이라고 할 수 있는
sbs는 이후 한국의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의 질을 지속적으로
하향 평준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방송은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관영방송체제로 시작되었다.

- 이승만 정부는 민영방송국을 잇달아 허가했다.
-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방송 관련 법령들을 제정했다.
- 1972년 10월 유신 직후인 12월 30일 한국방송공사법이 제정되었다.
한국의 방송체제는 국민 영 방송체제에서 공민영방송체제로 바뀐다.
- 1973년 2월 16일에는 기존 방송법이 개정되었다.
개정된 방송법의 핵심은 방송 통제 강화
- 신군부는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대대적인 언론 통제에 착수했다.
1980년 7월 언론인 강제 해직에 이어 11월 언론통폐합 조치가 발표되었다.
당시 방송협회와 신문협회의 자율 정화 형식으로 발표된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는 언론기관의 난립 등 전근대적 언론구조의 개선 등을 요구한 것이었다.
1980년 12월 31일에는 기존의 신문, 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언론윤리위원회법 그리고 방송법이 폐지되고 대신 언론 문제를
통합적으로 규율하는 언론 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공영방송체제를 이끌 최고 감독기관인 방송위원회가 출범하였다.
한국방송광고공사법도 제정되었다.
1987년 시민항쟁 이후 고조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언론 기본법은 폐지되었다.
1988년 12월 26일에는 방송문화진흥회 법이 제정되었다.
노태우 정권 출 법 이후 그 해 6월 14일 일방적인 방송구조 개편 계획을 발표하였다.
결국 1990년 8월 1일 공보처 개편안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방송법이 개정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기에는 이전의 정책 기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의 방송정책은 공익성보다 산업적 측면에서 더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전과 같은 물리적, 강압적인 통제가 없는 대신 비공식적인 간접통제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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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파 방송 밀청 사건 -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은 1942년에 서울의 경성방송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인 독립운동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단파 방송 수신 사건, 단파 방송 청취 사건이라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는 외국의 정세가 한국인에게 전파될까 봐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는 등 단파방송 청취자 단속을 강화했지만,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과 중국 국민정부가 송출하는 중경 방송국 한국어 방송을 듣곤 했다.
일제는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있다는 소문의 근원을 찾고자 했고,
단파방송이 그러한 소식의 원천으로 지목되었다. 
일본 고등계 경찰은 경성(당시 서울)에서 경성방송국의 단파 수신기 관리 근무자 등 
1942년 12월 말에서 1943년 초까지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해 경성방송국 직원 6명과 단파방송을 직접 듣거나
거기에 관련된 150명 가까운 방송인과 민간인 150~300여명이 체포되었다.
1943년 3월 공판이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75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중 6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도적인 기록 말살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고,
관련자에 대한 예우도 충분하지 않다.

미군정은 해방 후 경성방송국 기존 인력이 종전대로 방송을 계속하도록 했다.
해방 후 한국방송은 기존의 일본 방식에 미국식 상업주의시스템이 접목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사실 해방 후 방송은 민족 부흥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편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방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각 점령지역에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시장을 구축하는 차원에서 라디오를 접수했다. 
미군정 시기의 방송은 일종의 국영체제로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관철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침투 저지라는 두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미군정청이 방송을 직접 장악한 것은 방송을 유용한 선전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59년에는 최초의 민영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이 개국했다.
정부가 수립된 지 두달여만에 '정부조직법'에 따라 방송은
다시 공보처의 일개 부서로 흡수된다.
강력하게 뒷받침 된 이데올로기 홍보 매체로서의 방송은 계속되었다.

6.25 전쟁 이후 한국 라디오는 국책 홍보 수단 내지는 국민교육 수단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다. 1956년 최초의 방송 전문 잡지라고 할 수 있는
[월간 방송]을 창간했다.
라디오의 재미를 회복시킨 것은 미국 기독교 자본을 배경으로 등장한
최초의 민간방송 CBS와 최초의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이었다.
그럼에도 1950년대 라디오 뉴스는 공보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에서 라디오 뉴스는 민방이 본격적인 경쟁체제를 구축한 1960년대 중반
전국을 연결하는 종합 보도프로그램이나 저녁 뉴스쇼가 등장하면서 외형을 갖추게 된다.
정부는 국가 홍보 필요에 따라 1950년대 말 방송 재건과 라디오 수신기 보급에 적극 나선다.

군사정권 등장 이후 새로운 민영방송이 계속 설립되었다.
군사정권은 1962년 6월 직접 통제의 부작용을 우려하여 자율규제라는 명분으로
방송윤리위원회를 출범시킨다. 1960년대 이후 한국방송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조국 근대화의 기관차 혹은 국가 계몽의 확성기 역할을
하는 동시에 상업적 경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서구에서 라디오 방송은 20세기 초 등장한 전화와는 다른
대중매체로서의 의미 형성을 통해 사회의 공적 자원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라디오는 새로운 미디어로서 가치를 인정받았고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로
빠르게 대중화 되었다. 결국 한국 방송은 국가권력이 요구하는 선전과 공보,
미디어 기업이 요구하는 상업적 이익이 절충되는 지점에서 성장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방송정책 역시 정부의 홍보 및 선전 매체로서의
기능 확대를 위하여 그리고 5.16 이후 몇 차례의 정변 시기에도 방송은 정권 안위를 위한
주요 매체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한국 라디오의 태생적 한계는 이후
텔레비전, 다채널방송 등 새로운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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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전파미디어인 라디오는 1920년대 시작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라디오 방송은 자국외의 식민주의 세력의
필요성에 따라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인 경성방송국은
1927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 전략이자
문화 정치수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라디오는 해방 이후 역시 미군정을 거치면서
국가의 공보수단으로 국가시스템의 일부가 되었다.
한국라디오의 경우 일본 방송시스템이 이식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미군정을 거치면서 미국식의 상업주의와 언론 자유라는 가치가 혼재하게 되었다.

근대 미디어들은 1940년대를 거치면서
미디어의 본질적 성격과 무관하게 국가의 통치수단이나
공공정보를 확산하는 수단 혹은 '확성기'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 라디오는 이전의 신문이나 소설과 같은 사적 미디어와는
확연히 다른 공적인 시스템과 가정 혹은 마을 단위의 공동수신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 이전에는 신문이나 대중소설이 이러한 기능을 제한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라디오가 발전하게 된 것은 해상에서 통신의 혁신을 위해서였다.
1920년 미국에서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된 이후,
라디오는 신속하게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대중매체로서 라디오는 신속성이 있고,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친밀감이 있으며, 문자 독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상시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라디오는 현장에서 바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고,
메시지 제작과 송수신에 있어서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작용하여 라디오는 발생 이후,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가장 보편적인 미디어로 남아있다.
이렇듯 라디오는 대중의 일상생활 공간에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최초의 미디어였고 그 속성을 정확하게 이해한 국가 권력과 자본이
경쟁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는 국가권력이 방송국을 직접 설립, 운영함으로써
용이하게 백성을 국민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한국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네번째 방송국으로 출범한 경성방송국은 내선일체 원칙에 따라
콜사인까지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배정받았던 것이다.
경성방송국 설립의 목적도 최초 방송에 실렸던 일본 국가처럼,
식민지 정책전달, 황민화운동의 전개, 제국주의 목적 달성을 위한
사탕발림이라는 3대 사명에 내선융화라는 식민지 총독부 정책이 가미된 것 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방송의 핵심기능으로 이어져 온 '선전' 혹은 '공보'기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방송구조, 행정, 편성, 장르, 기술, 인력은 청산되지 못한 식민의 잔재였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민간방송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라디오를 식민통치 수단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라디오방송은 국민이 국가 이슈에 주목하게 하는 보도미디어이자
국민교화 미디어로 자리 잡는다. 이후 일본 라디오 방송은
민주사변을 계기로 전시체제로 돌입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완전한 선전기관으로 변모하여 국민총동원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 활용되었다. 경성방송국이 1933년 이후 일본어, 조선어
이중방송을 내보내게 된 것은 사실 원활한 전쟁수행과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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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신문이란 별쇄형태로 편집되어야 하고

별쇄의 내용이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섹션의 유형은 크게 분류 섹션과 부가 섹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분류섹션 -

신문지면의 급격한 증가로 인하여 독자들이

신문기사를 제대로 찾아보기 어렵게 된 상황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본지 개념에 속하는 고정된 내용을 주제별로 분리해

매일 똑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고정 섹션의 성격을 띰

 

- 부가 섹션 -

기존의 본체 신문을 두고 새로운 신문 독자의 영입을 위하여

특별한 주제의 부록판을 일정한 주기별로 만든 데 기원을 둔 것

요일이나 특별한 사안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는

가변 섹션의 형식을 주로 취함

 

신문의 섹션화는 몇 가지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1. 유사한 기사를 통합하여 독자들의 기사 접근을 쉽게 해주는 기사의 유목화 기능

2. 특정지면에 유사한 정보들이 집중적으로 모이면서 정보의 전문화가 진전

3. 신문의 전체적 통일성과 지면별 개성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지면의 시각화. 즉, 다량의 특화된 정보를 효과적으로 분류, 제시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색채나 그래픽 등의 시각적 만족을 줄 수 있는 수단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국내 신문중에서는 <중앙일보>가 최초로 1994년 9월부터

본지, 경제섹션, 스포츠 섹션의3 섹션 체제를 실시했다.

1997년부터 신문들이 본격적으로 섹션화를 시도했다.

섹션제는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신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면인 동시에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기피하는 신세대를 겨냥한 대응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섹션면은 독자들의 다양하고 전문화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써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최근 들어서는 대부분의 신문들이 분류 섹션뿐만 아니라

연성화 된 내용을 중심으로 부가 섹션을 활발히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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